
누군가에게 [우아한 연인]을 권하면서 들춰봤다가 결국 다시 읽어버렸다.
마음이 썩 편하지 않을 때는 사랑했던 책에서 얼마간의 위로를 얻을 수 있다는 건 진리인가 보다.
이브가 일어섰다. 순간적으로 나는 이브의 찬란한 모습을 고스란히 볼 수 있었다. 어깨에서부터 우아한 선을 그리고 있는 드레스와 손에 든 빨간 클러치백 덕분에 이브는 존 싱어 사전트가 그린 전신 초상화 같았다.
“세상이 멸망하는 날까지.” 이브가 옛 인사를 되새겨주었다.
“세상이 멸망하는 날까지.”
p 192
다시 읽으니 처음 읽을 때는 알지못해서 그냥 지나쳤던 작가들, 책이름, 장소들이 눈에 들어왔다.
돌아가시기 얼마 전의 어느 날 밤, 내가 아버지의 침대 옆에 앉아서 기운을 좀 북돋아드리려고 멍청한 직장동료 이야기를 하고 있는데 아버지가 느닷없이 옛날이야기를 꺼냈다.
너무나 맥락에서 벗어난 이야기라서 나는 아버지가 헛것을 보시는 줄 알았다.
아버지는 살면서 아무리 힘든 일이 닥쳐도, 아무리 풀이 죽고 기운이 빠져도, 자신이 언제나 이겨낼 수 있을 거라고 확신했다고 말했다. 당신이 아침에 일어나 처음 커피를 마시는 순간을 고대하는 한은 이겨낼 수 있을 거라고. 나는 그로부터 수 십년이 지난 뒤에야 비로소 그것이 아버지가 내게 해준 조언이었음을 깨달았다….
그때 아버지가 당신 인생의 결말을앞두고 내게 말하려고 했던 것은 이 위험을 가볍게 보면 안된다는 것이었다.
우아함이나 박학다식처럼 온갖 화려한 유혹들에 맞서서 소박한 즐거움을 지켜야한다.
돌이켜 생각해보면, 내게는 찰스 디킨스의 책들이 아버지의 커피 한잔과 같은 역할을 했다.
소외계층에 속하면서도 용감한 책 속의 젊은이들과 아주 적절한 이름을지닌 악당들에게 조금 짜증스러운 구석이 있는것은 솔직히 사실이다.
하지만 나는 아무리 우울할 때도 디킨스 소설을 읽다가 정거장을 지나칠 만큼 책에 몰입할 수만 있다면 모든 일이 잘 풀릴 가능성이 높아진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p209
“처음 봤을 때부터 나한테는 당신 안의 차분함이 보였어요. 사람들이 책에 써놓았지만 실제로 갖고 있는 사람은 거의 없는 것 같은, 내면의 고요함 같은 것. 그래서 속으로 이런 생각을 했죠.
저 여자는 어떻게 저럴 수 있지. 그러다가 저건 후회가 없는 사람만이 가능하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뭔가 결정을 내릴 때.. 아주 차분한 마음으로 단호하게 결정을 내리는 사람만 가능한 일이라는 생각. 그게 나를 멈칫하게 했죠. 그래서 그걸 다시 보고 싶어서 참을 수가 없었어요.”p370
[월든]에서 자주 인용되는 구절이 하나 있다.
소로가 우리에게 자기만의 북극성을 찾아 선원이나 도망노예처럼 흔들림없이 그 별을 따라가라고 권고하는 구절이다. 그 구절을 읽으면 짜릿한 기분이 든다. 우리가 충분히 포부를 품을 만한 가치가 있다는 사실이 그토록 뻔히 보이니까.하지만 그 진정한 길을 계속 따라갈 수 있을 만큼 사람의 자세심이 뛰어나다 해도, 진짜 문제는 자신의 별이 하늘의 어느 부분에 거하고 있는지 알아내는 일인 것 같다는 생각이 옛날부터 항상 들었다.
하지만 [월든]에서 지금까지 항상 내 곁에 머무르는 구절은 그것뿐만이 아니다. 소로는 진리가 멀리 있다는 생각은 잘못된 것이라고 말한다.
저 멀고 먼 별뒤에, 아담이 태어나기 이전과 심판의 날 이후에 진리가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 모든 시대와 장소와 일들이 모두 지금 이곳에 있다.” ‘지금 이 곳’에 이토록 찬사를 보내는 것이 어떤 의미에서는 자신만의 별을 따라가라는 권고와 어긋나는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이 말도 별을 따라가라는 말만큼 설득력이 있다.
게다가 도달하기가 훨씬 더 쉽다.
나는 팅커의 스웨터를 다시 입고 까치발로 복도를 걸어가 그의 방 앞에 섰다.
p372
최근에 비비언 고닉의 [끝나지 않는 일] 첫 페이지가 마음에 들어 샀다가 그대로 책장에 모셔두었다.
내 경험으로 인생 초년에 중요하게 생각했던 책을 다시 읽다 보면, 긴 의자에 누워 정신 분석을 받는 느낌이 들 때가 있다.
다년간 마음에 품었던 서사가 느닷없이 불려나오면 정신이 번쩍 들도록 심각한 의문점들을 맞닥뜨리기 마련이다.
이런저런 인물이며 이래저래 전개된 줄거리며 잘못 기억하고 있던 것도 한둘이 아니다. 그들이 여기 뉴욕에서 만났구나, 나는 로마라고 철떡같이 믿고 있었네.
한데 그래도 또 책을 읽는 동안 바깥 세상은 방울방울 멀어져만 가니 그저 놀랄밖에.
이도 저도 내 착각이었다면, 어떻게 이 책은 아직도 이렇게 내 마음을 사로잡을까.
비비언 고닉 [끝나지 않는 일]중에서
작가들은 어떻게 이런 글들을 쓸 수가 있는 것인지.
4년에 한 번씩 책을 낸다는 작가의 새 책이 나오려면 아마 2년쯤은 더 기다려야할 것 같다.